그린 듯한 초현실적 세계…이거 사진 맞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06호 16면

제 8회 부산국제사진제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 한국 아방가르드 사진의 선구자 황규태(86) 작가의 말이다.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22일까지 부산항 제1부두 창고에서 열리고 있는 제8회 부산국제사진제에서라면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록’에 충실했던 본질에서 벗어나, 현실과 내면을 교차하며 초현실적이고도 감각적인 풍경을 ‘상상한’ 사진들이 한여름 밤의 꿈을 선사한다.

제8회 부산국제사진제 주제전 ‘한여름 밤의 꿈’에선 영상, 설치, 디지털 등 다양한 시각적 언어를 활용해 작가 개인의 기억과 서사를 감각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소개됐다. 안드레스 베르테임의 ‘미술관의 유령들’ 시리즈. [사진 부산국제사진제]

제8회 부산국제사진제 주제전 ‘한여름 밤의 꿈’에선 영상, 설치, 디지털 등 다양한 시각적 언어를 활용해 작가 개인의 기억과 서사를 감각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소개됐다. 안드레스 베르테임의 ‘미술관의 유령들’ 시리즈. [사진 부산국제사진제]

올해로 8회를 맞는 ‘2024 부산국제사진제’는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이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시작한 민간주도형 예술행사다. 정형화된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나 올해의 주제전 ‘한여름 밤의 꿈’은 사진의 가능성과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라는 동명의 희극이 떠오르는 타이틀의 진가는 1970년 지어진 거대한 물류창고 안으로 발을 딛는 순간 깨닫게 된다. 로저 발렌, 안드레스 베르테임, 리자 암브로시오, 김용호, 토마즈 라자르, 원성원, 이정록, 요하네스 보그라 등 8명의 초대작가들이 보여주는 세상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초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다.

로저 발렌의 ‘새들의 수용소’ 시리즈. [사진 부산국제사진제]

로저 발렌의 ‘새들의 수용소’ 시리즈. [사진 부산국제사진제]

그림 속 주인공들이 액자 밖으로 뛰쳐나오는가 하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 위에는 수십 채의 집이 실려 있고, 푸른 초원 위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흰 사슴이 서 있다. 관람객들 사이에선 “이게 사진이야?”라는 질문이 연속해서 터져 나온다.

이 작품들은 일명 ‘만드는 사진(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이다. 작가가 자신이 생각한 주제와 서사를 표현하기 위해 피사체를 세팅·연출해서 촬영하거나 필름 태우기, 콜라주 등의 다양한 공정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 영상, 조각, 설치 등 다른 장르와의 협업도 자연스러워 시각적 언어의 경계도 없다. ‘찍는 사진(테이킹 포토·taking photo)’, 즉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스트레이트 사진의 영역에서 본다면 “사진이 아니다” 비판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계 넘어서기’ ‘다르게 보기’를 위해 오히려 지난한 노동집약적 과정을 선택한 이들 역시 출발은 ‘사진’이다.

이정록의 ‘루카(LUCA)’ 시리즈. [사진 부산국제사진제]

이정록의 ‘루카(LUCA)’ 시리즈. [사진 부산국제사진제]

‘발레네스크’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한 로저 발렌은 사람·동물·사물이 어수선하게 얽힌 우화 또는 만화 같은 이미지들을 선보였는데, 그중 ‘새들의 수용소’ 시리즈는 실제로 새와 함께 사는 노숙인 집단을 5년 넘게 관찰하면서 촬영한 사진이다. 버려진 물건으로 가득한 공간에 선사시대 동굴벽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노숙인에게 익명의 탈을 쓰게 하고, 포즈를 요구했지만,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선 또 다른 아날로그적 기록사진이다.

안드레스 베르테임의 ‘미술관의 유령들’은 전 세계 여러 미술관에서 촬영한 다중 노출 이미지를 통해 현실의 다양한 시각적 층위를 탐구한 작품이다. 작가는 “각 촬영에선 눈앞의 장면을 그대로 기록하지만, 이미지를 겹치는 과정을 통해 ‘사진의 진실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지 못하는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김용호의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 스틸무비 가운데.

김용호의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 스틸무비 가운데.

상업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김용호 작가는 4585장의 사진을 편집해 만든 스틸무비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를 선보였다. 사진 속 호랑이·토끼 탈을 쓴 남녀는 산동네를 배경으로 전후 급성장한 도시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디아스포라와 빈부격차, 혼란을 대변한다. 전시장 한편에선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 영상 시청도 가능하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과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동명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해금·정가 등 한국의 소리와 한국적 이미지를 더해 동·서양,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묘한 세계를 창조했다.

원성원 작가의 ‘현실주의자의 공상’ 시리즈는 콜라주 작업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촬영한 수천 장의 사진을 포토샵으로 오리고 병치해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을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로 직조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사물들을 낯선 상상의 세계에서 맞닥뜨리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원성원의 ‘현실주의자의 공상’ 시리즈.

원성원의 ‘현실주의자의 공상’ 시리즈.

이정록의 ‘루카(LUCA)’ 시리즈는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연못’ 한라산 백록담에 전해져오는 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슴과 조우하면서 관람객 역시 신화·전설 속 서사와 함께 영적인 기운을 상상하게 되는데, 이때 누구도 이 풍경이 철저하게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라고 상상하지 못한다. ‘생명의 나무’ ‘나비’를 포함해 ‘루카’ 시리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작가는 오랜 시간 정성들여 ‘순간’을 준비한다. 앙코르와트부터 아이슬란드 화산지대까지 찾아다니며 자신의 신화를 완성시켜줄 배경을 찾고, FRP(섬유강화플라스틱)로 만든 사슴 조각을 옮기고, 완벽한 빛을 만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며 셔터 누르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석재현 부산국제사진제 예술감독은 “타이틀이 의미하는 ‘한여름 밤’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 내면으로 향하는 시간”이라며 “현실을 살아내기 급급해 비물질적인 영역,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무의식의 세계까지 면면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면 이번 기회에 물리적인 시간과 비물리적인 시간, 현실과 내면이 교차하는 작품들을 통해 무뎌진 내면의 감각을 깨워보라” 제안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